본문 바로가기

잡동사니

한국경제 개발에 대한 피어슨 평가보고-2. 경제구조

728x90

한국은행 전자조서관   해외경제포커스 제424호 1970. 02. 23

http://dl.bok.or.kr/search/DetailView.ax?sid=19&cid=155040

2. 경제구조

한국은 인구가 많으며 광물자원이 부족하다. 광물자원은 중석, 약간의

저급 석탄, 철광석, 고령토 그리고 소량의 다른 광물에 한정되어

있으며 석유나 점결탄은 없다. 토지는 산이 많으며 전시중의

살림 남벌로 황폐되어 있다. 한국은 가난하다는 데 변함은 없지만

통절한 빈곤이란 인상은 주지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소득분배가 대체로 공평한 탓이며 또한 가옥이 작으면서도(기후상의 이유에서)

튼튼한 탓이며 또 하나는 인구의 거의 100%가 독서능력이 있으며

국민들의 자존심이 높은 까닭이다. 한국의 주된 자산은

의심할 여지없이 잘 교육되고 근면하며 세련된 인구이다.

이인구의 55%이상이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 비율은

이처럼 가난한 국가로서는 놀랄만큼 낮은 비율이다. 약 3/1의 국민이

인구 2만명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다. 그 교양은 특히 기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며 또한 해방, 인플레, 전쟁 그리고 현재의 급속한 성장의 경험은

사회적 기술적 변화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창출하였다.

영리기업의 태반은 소기업에서 출발하였으며 그들이 큰 규모로 성장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회사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가족지배 형태이다. 은행(그 몇개는 민간 소유이다)은 정부가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전술한 바 모든 것은 분권화된 시장지향적인 개발기업으로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한 제조공업에 대한 투자에 있어서 한국이

월등하게 소망스러운 입장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한국은

미일양국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생기는, 다른 발전 도상국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극히 유리한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국의 기업이나 잠재적 기업가들은 주둔 미군과의 두터운 교재가 있었던

탓으로 후에 유익하였다는 것이 증명된 바와 같은 많은

기술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기업가는 미군병사의

달러를 획득하려는 경쟁에서 마케팅기술 뿐만 아니라 공작적기능,

경영법, 원재료조작기능 , 나아가서는 미국시장의 특징에 대한 몇가지를

배웠다. 만일 한국문화가 개개의 기업을 자극시키지 않았더라면 이 일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시장은

상세한 지식 없이는 발전 도상국의 가격이 유리하다는 점만으로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장이다.

유행의 기회(즉 가발이나 스웨타)를 포착해 낼 때의 한국의 큰

성공이 기업의 덕분이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다분히

복수한 지식에 힘입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경험은 또 근대화학이나

전기기술에 관련되는 가업에 손을 댔을 그 효과가 잘 나타났으며 일제하에서의

그들의 경험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경험적 성공을 퍽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조직은

여러 선진국보다도 큰 금융상의 규제장치를 조작하는 강력한 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시장기구의 적극적인 활용과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조직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의 경제구조에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일본의 공업은 수십년 사이에

대규모 고임금부분이 성장하고 소규모 저임금부문(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부분의 근대과학기술이

사용되고 있다.)은 축소되었다. 1960년대의 초기에 즉 한국의 공업화가

시작 되었을 무렵 일본은 실질적으로 저임금노동에서 벗어났다. 한국인은 비로소 기업에

바탕을 두고 이를 공업의 넟개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본과 기업은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1965년이후 (주로 공급자 금융과 지급보증에 의해서)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극히 인상적인 한국의 수출 신장은 다른 저개발국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경험은 고수준의 교육, 현실적인 외환을 그리고

노동조합이 전공업임금율을 이 나라의 적정수준에서 유지시키려는 노력등이 수출가능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의 공업화는 극히 최근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업생산에서

정하는 중간재비율이 매우 높고 (1966년 47%) 반대로 최종소비재의 비율은 낮다.

이 중간재의 비율은 이스라엘보다도 높으며 인도를 약간 하회하는 비율이다. 농업은 주도적인

성장부문은 아니지만 60년 대중에 연율 약 5%라는 매우 만족스런 성장을 보였다.

한국은 독립이전에는 쌀의 잉여지대였다. 그후 난민의 유입, 인구의 자연증가, 국토의 침식

그 밖의 손해는 쌀의 잉여를 파먹고 들어 갔으며 한국전쟁이후는 쌀을 수입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었다. 주요한 개선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3종류가 있었다. 주요한

개선은 일본식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채용(종자의 선택, 살충제, 비료, 집약적인 토양의 개량, 비닐하우스의 이용),

토지의 이용을 높이기 위한 근대기술의 사용 (산지의 계단식 이용, 저수지 및 하구의 간척건설) 및 특수한

독립이래 농업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1948년과 1950년의 토지개혁으로 자작농은

50%이상으로 증대하고 또한 소유지의 배분도 증가하였다. 그후 개간, 산채하는 토지의

집약, 수출용특수작물의 육성 및 서비스의 확대등의 계획사업을 정력적으로 실시했다. 어업은

큰 잠재적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다. 어류자원은 훌륭하지만 생산성은 1961년까지 정체하고 있었다.

제 1차 5개년계획하에 그 산출량은 연율 약 7%로 증가하였다. 제 2차 계획에서는

자동화와 개발이란 한층 더 적극적인 계획이 짜여 졌으며 특히 심해어업에

대해서는 초년도 45%증가, 그 후 30% 성장이란 목표를 내걸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인구의 3/1이 서울에서 살았는데, 한국전쟁으로 그 도시가 파괴 됐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그당시 유망 업종인 농업에 과감히 투자했지만,

50년뒤, 서울에 사는사람은 갑  지방에 사는 사람은 을이 됐다..

역시 사람을 미래를 볼 줄 알아야댐.. 지금 유망한 것만 찾다가 .. 그냥 개털댐.. ㅠㅠ

728x90